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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2011년 |
2011년 10월 7일, 한국의 조간신문 1면은 모두 한 인물의 흑백사진이 차지했다. 부고 기사를 맡은 기자들은 가능한 한 최고의 문장력을 발휘해 이 사람을 추모했다.
전날 아침, 출근 길 인터넷으로, 라디오로, 아이폰으로 그의 죽음을 접한 많은 사람들은 한번도 만나 본 적 없는 그가 이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에 큰 슬픔과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는 마더 테레사(Theresa)나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처럼 위대한 현인의 반열에 오른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의 전 재산을 기부하기로 한 세계 제일의 부자도 아니었다. 오히려 성격적으로 결함이 매우 많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인들이 그를 마음 깊이 애도했다.
한 기업가의 죽음이 이렇게 세계를 울린 적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다. 기업가라기보다 예술가나 장인이라는 칭호가 좀 더 어울리는 삶을 살았기 때문일까. 적어도 그가 만든 제품, 아니 작품을 써본 사람들은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했던 그의 강한 열망에 깊이 공감했던 것 같다.
실리콘밸리에서 태어나 성공한, 실리콘밸리 키드
스티브 잡스(Steven Paul Jobs, 1955~2011년)는 1955년 2월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생부는 시리아계 압둘파타 잔달리(Abdulfattah Jandali), 생모는 미국인 조앤 쉬블(Joanne Carole Schieble)이었다. 두 사람은 쉬블 아버지의 강한 반대로 결혼할 수 없게 되자, 아이를 폴-클라라 잡스(Paul Reinhold Jobs, Clara Jobs) 부부에게 입양보냈다. 잡스는 양부모에 대해서 "그들은 1,000% 내 부모"라고 한 반면, 친부모에 대해서는 "그들은 정자와 난자 은행일 뿐"이라고 말한 적도 있다.
어린 시절의 잡스는 사고뭉치였다. 하지만 초등학교 4학년 때 선생님은 그의 수학능력을 테스트한 뒤 고등학교 2학년 수준이라는 것을 알고 잡스가 월반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HP의 엔지니어 래리 랭(Larry Lang)은 어렸을 때 그를 이끌어준 멘토 중 한 명이다. 랭에게 히스키트라는 전자 장치를 소개 받은 잡스는 기계와 전자공학에 대한 관심을 키웠고, 거대한 컴퓨터도 구경할 수 있게 되었다. 열세 살 때 잡스는 실리콘밸리 창업의 원조라 할 수 있는 HP의 공동 창업자 빌 휼렛(Bill Hewlett)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주파수 계수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부품을 지원해 달라고 했다. 휼렛은 이 맹랑한 소년에게 부품뿐만 아니라 여름방학 아르바이트 자리까지 내주었다.
잡스가 고등학교 때 만난 가장 큰 인연은 스티브 워즈니악(Steve Wozniak, 1950년~ )이다. 그는 그때까지 자기보다 전자장치를 잘 조립하는 사람은 만난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은 당시를 풍미했던 히피문화에도 관심이 많았다. 다만 두 사람의 성격은 상당히 달랐다. 워즈니악은 말 그대로 '뼛속까지 순수한 엔지니어'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잡스는 기계뿐 아니라 고전 문학과 음악도 좋아하는, 예술적 감성과 영적인 탐구심이 강한 스타일이었다.
이 모든 것이 그가 자란 실리콘밸리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많은 IT 업체의 창업자들이 다른 곳에서 나서 실리콘밸리로 이주해 일을 시작했지만, 잡스는 실리콘밸리에서 인생을 시작했다.
스무 살, 애플을 만들다
잡스의 대학 시절은 짧았지만, 스탠퍼드대학 졸업 연설 덕분에 널리 알려져 있다. 2005년 잡스는 스탠퍼드대학 졸업식에 참석해 15분가량의 짧은 연설을 한다. 이 연설이 아이폰의 대성공 후 전 세계에 다시금 알려지면서 '괴짜 기업가'였던 그의 이미지는 '21세기 철학자'로 승격되었다.
"여러분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다른 사람의 삶을 살기 위해 인생을 허비하지 말라.", "항상 갈구하고, 항상 무모하라.", "만약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내가 오늘 하려던 일을 하겠는가?", "위대한 일을 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가장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다. 아직 (그런 일을) 찾지 못했다면 계속 찾아봐라." 연설을 통해 잡스가 남긴 많은 명언은 사람들에게 진한 여운을 주며 회자되었다.
잡스는 연설에서 리드대학에 들어간 지 겨우 6개월 만에 그만 둔 이유로 "평범한 노동자였던 부모님이 힘들게 모아뒀던 돈이 모두 학비로 들어갈 정도로 학비가 비쌌지만, 6개월 후 대학생활은 그만한 가치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자퇴 후에는 재미없던 필수과목 대신 흥미 있는 과목들을 청강했다.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강의 중 하나가 캘리그래피(서체 디자인)였다. 이는 10년 후 매킨토시의 유려한 서체를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1974년에는 게임회사 아타리에 들어갔으며, 인도로 수행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아타리는 잡스에게 '브레이크아웃'이라는 벽돌깨기 게임 설계를 맡기면서, 칩을 50개 미만으로 사용하면 줄어든 칩에 비례해 보너스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잡스는 워즈니악에게 보수를 반씩 나누는 조건으로 도움을 청했고, 워즈니악은 불과 4일 만에 45개의 칩만으로 게임을 설계해 낸다. 하지만 잡스는 5,000달러를 받은 뒤 워즈니악에게는 총 보수를 숨긴 채 겨우 350달러만을 주었다고 한다.
1975년 워즈니악은 직접 키보드가 달린 컴퓨터의 시제품을 만들었다. 다음해 워즈니악은 이를 개량해 나무 상자에 키보드와 본체를 넣은 투박한 모양의 '애플I'을 만들어 잡스에게 보여줬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아내는 데 천재적인 능력이 있는 잡스는, 그것이 바로 '미래'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자신의 자동차를 팔아 부품을 구입하고 워즈니악에게는 HP를 관두고 이것을 만들어 팔자고 제안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애플컴퓨터를 창립했다. 1977년, 사실상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라 할 수 있는 애플II가 세상에 나왔다. 우리가 생각하는 보통 컴퓨터의 형태, 즉 모니터, 본체, 키보드, 디스크 드라이브가 달린 책상 위에 올려놓을 수 있는 컴퓨터가 세상에 나타난 것이다. 애플II는 전 세계에서 200만 대가 팔렸다. 1980년 애플은 주식 시장에 상장되었고 두 사람은 백만장자가 되었다.
1978년에는 마우스로 구동하는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를 갖춘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 '리사'를 출시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컴퓨터는 키보드를 이용해 알파벳과 숫자만 입력할 수 있었다. GUI 기술은 잡스가 제록스의 팔로 알토 연구소(PARC)에서 처음 본 것을 상용화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제록스는 이것의 가치를 몰랐다. 마치 워즈니악이 애플I을 만들었을 때 그 가치를 바로 알아차린 것처럼, 잡스는 GUI 기술을 보자마자 이것이 패러다임을 바꿀 놀라운 기술임을 알아차렸다. 리사는 너무 비싼 가격 때문에 바로 사라졌지만, 1984년 이보다 값을 낮춘 '매킨토시'가 나오게 된다.
매킨토시는 여러 가지 면에서 잡스를 상징하는 제품이다. 사실 애플II는 천문학적 성공을 거뒀지만 잡스의 작품이라기보다는 워즈니악의 작품이었다. 잡스는 자기만의 컴퓨터를 만들고 싶어 했고, 그 첫 작품이 리사였고 결실이 매킨토시였다.
우선 매킨토시는 처음으로 상업적으로 성공한 '마우스+GUI' 컴퓨터였다. 모니터와 본체를 일체화해 디자인의 단순함을 구현한 점, '다르게 생각하라(Think different)'를 모토로 삼은 점, 리들리 스콧(Ridley Scott) 감독이 만든 기념비적 광고를 통해 '제품으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철학을 전달하려 한 점 등 매킨토시는 잡스의 제품 철학을 농축시켜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한 여성이 힘차게 달려와 사람들을 세뇌하고 있는 화면 속 빅 브라더(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에 등장하는 독재자)를 향해 해머를 던진다. 이 광고는 애플이 당시 컴퓨터 업계를 독점하던 IBM(빅 브라더)에 대항해 신제품(매킨토시)을 출시한다는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서른 살, 자신이 만든 회사에서 쫓겨나다
빠른 성공은 빠른 몰락을 불러왔다. 독선적 성격, IBM 호환 PC의 급속한 보급에 따른 매킨토시의 판매 부진 등으로 회사 안에서 입지가 좁아졌던 잡스는 서른 살이 되던 1985년, 자신이 "설탕물이나 팔 거냐"며 펩시코(펩시콜라 제조사)에서 직접 영입했던 존 스컬리(John Scully)에 의해 경영 일선에서 쫓겨났다. 스무 살에 만든 회사에서 백만장자가 되었지만 겨우 서른 살에 자신이 만든 회사에서 쫓겨난 것이다. 비참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이 일이 있은 후 1997년 애플로 다시 돌아올 때까지 10여 년은 잡스의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잡스 역시 스탠퍼드대학 졸업식 축사에서 "당시에는 몰랐지만, 애플에서 해고당한 것이 나에게 일어날 수 있었던 최고의 사건이었다"고 말했다.
잡스는 이 기간 넥스트를 창업하고 픽사를 인수하는 등 두 회사를 만들고 운영하면서 최고경영자(CEO)로서 조직을 운영하는 방법에 대해 다시 체득했고, 기술력과 창의성을 배가시켰다. 픽사는 잡스가 CEO이던 시절에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으나, 나중에 〈토이스토리〉로 세계적 성공을 거둔 뒤 디즈니에 인수되면서 잡스에게 커다란 부를 안겨주었다.
파월은 잡스 사망 후 「포브스」가 발표한 억만장자 명단에 처음으로 이름을(100위) 올렸다.
1989년에는 부인 로렌 파월(Laurene Powell Jobs)을 만났다. 잡스는 로렌을 처음 보자마자 사랑을 느꼈다고 했지만, 사실 로렌이 임신을 했을 때 처음에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로렌이 충격을 받고 그의 곁을 떠나자 결국 잡스는 로렌과 가정을 꾸리기로 결심하고 이후 세 자녀를 낳으며 가정적인 남자로 변모한다. 자녀들과 수영장에 같이 가고, 학교 수업도 참관했으며, 할로윈데이에는 무서운 괴물 분장도 할 정도였다. 월터 아이작슨(Walter Isaacson)을 통해 자신의 치부까지 들어내는 전기를 집필토록 한 것 역시 아이들에게 "아버지는 이런 사람이었다"는 것을 남기고 싶어서였다고 전해진다.
물론 그의 독선적인 경영 행태는 1997년 애플에 돌아와서도 계속되었다. 하지만 12년 동안의 경험 덕분에 잡스는 애플 복귀 후 아이맥, 아이팟, 아이북, 아이폰, 아이패드 등 IT 업계에 길이 남을 혁신적이고, 아름답고, 이용자를 세심하게 고려한 제품을 계속 선보일 수 있었다.
잡스가 애플 복귀 후 제일 먼저 선보인 제품은 아이맥이다. 모니터와 본체 일체형 디자인에 투명한 색상을 입혀 감성을 자극했다. 그때까지 윈도 운영체제를 장착한 수많은 IBM 호환기종의 컴퓨터들이 나왔지만 컴퓨터에 감성적 디자인을 접목시킨 제품은 거의 없었다. 아이맥은 이런 세상에 충격을 준 것이다. 덕분에 1997년 10억 달러의 적자를 냈던 애플은 다음해 4억 달러의 흑자로 전환했다.
MP3 플레이어 아이팟은 기계뿐 아니라 '생태계'를 만들면서 시장을 창출해 낸 첫 작품이다. 이전에도 다양한 MP3 플레이어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MP3 플레이어는 CD에서 추출한 MP3 음악파일을 재생하는 단순한 기계일 뿐이었다. 하지만 잡스는 무료 음악공유 서비스 '냅스터'로 CD 판매가 급감한 후 파일 형태의 음원 유통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던 음반 제작자들을 설득했다. 결국 음원 파일을 불법 복제가 아닌 유료로 유통시키는 아이튠즈 뮤직스토어를 만들었다. 미려하면서도 편리한 이용자 환경과 아이튠즈를 통한 편리한 음원 구매 방식이 결합해, 아이팟은 세상에 둘도 없는 MP3 플레이어가 되었다.
아이폰, 세상을 혁신하다
잡스의 명성을 전 세계에 알린 것은 뭐니뭐니해도 2007년 출시된 아이폰일 것이다. 사실 처음에는 다들 반신반의했다. 노키아, 모토로라, 삼성전자처럼 오랫동안 휴대폰을 만들어 온 강자가 있는데 과연 경험 없는 애플이 만든 제품이 전화나 제대로 걸리겠느냐는 회의적인 반응도 많았다.
'손 안의 컴퓨터'를 만들겠다는 생각도 그가 처음 한 것이 아니었다. 훨씬 오래 전부터 마이크로소프트는 PDA 등 모바일 기기용 윈도 운영체제를 만들어 왔고, 삼성전자 등도 그런 운영체제에 기반한 제품을 만들기도 했다. 물론 엄청나게 불편했다. 대화면 컴퓨터에서 마우스를 사용할 때 쓰던 방식을 좁은 화면에 그대로 구현했기 때문이다. 터치스크린 방식의 휴대폰도 있었다. 하지만 꽉 눌러야 반응했고, 대부분 스타일러스(펜)를 필요로 했다.
하지만 아이폰은 전혀 달랐다. 별도의 펜 없이도 손가락으로 살짝 만지는 것만으로 모든 조작이 가능했고, 왼쪽 오른쪽으로 스칠 때마다 화면이 사용자의 기대대로 움직였다. 아기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편리한 사용자 환경(UI), 수려한 디자인, 사용자의 반응속도를 정확히 고려한 설계는 이 제품이 '완벽함'이라는 목표를 향해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다듬어졌는지를 알려줬다. 아이폰을 한번이라도 경험해 본 사람은 애플, 그리고 잡스의 추종자가 되었다.
아이폰은 휴대폰 시장을 뒤흔들었다.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것 같았던 핀란드 노키아는 스마트폰 시장에 신속히 대응하지 못해 추락했다. 모토로라는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를 보급한 구글에 인수되어 버렸다. 반면 삼성전자는 2009년 아이폰3GS가 국내 출시되어 엄청난 반응을 일으키자 이와 거의 유사한 '갤럭시S'를 만들고, 이 경험을 토대로 훨씬 안정적이고 개량된 갤럭시S2와 갤럭시 노트 등 다양한 제품군을 내놓으면서 세계 휴대폰 시장 1위까지 차지했다.
애플의 아이폰은 휴대폰의 제조사와 소비자가 이동통신사의 횡포에서 벗어나 자신의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하는 역할도 했다. 이른바 '피처폰' 시대의 사람들은 무선 인터넷을 조금만 사용해도 '요금 폭탄'을 맞았고, 이동통신사가 승인한 몇 안 되는 프로그램만 사용할 수 있었다. 심지어 와이파이는 전국 각지에 구축되어 있었지만 휴대폰으로는 이용할 수 없었다. 이동통신사들이 무선인터넷 수익을 위해 제조사에게 와이파이 수신기능을 탑재하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9년 말 국내에 아이폰 3GS가 출시되면서 세상은 완전히 바뀌었다. 아이폰 출시와 동시에 다른 휴대폰에도 와이파이가 탑재되기 시작했고, 멜론이나 도시락 같은 이동통신사가 운영하는 음원사이트 외에 다른 음원사이트도 모바일에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사용자들은 더 나아가 직접 콘텐츠를 만들고 이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개발자들은 이동통신사에게 자기가 만든 프로그램이나 게임을 일일이 승인 받을 필요 없이 공개된 장터(앱스토어)에 직접 올려 수익을 올렸다. 사용자도 수천, 수만 개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팟캐스트를 통해 제도권 언론매체가 아닌 직접 만든 뉴스와 방송 프로그램을 청취하거나 만들어 올릴 수 있게 되었고, 유명한 팟캐스트는 정치와 선거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권력을 누리게 되었다.
아이폰이 세상을 바꾼 것이다.
세상을 바꾼 미친 사람들
아이폰으로 대성공을 거뒀지만 잡스는 췌장암 수술 후유증으로 점차 건강이 악화되었다. 아이패드를 발표할 때 그는 평소처럼 멋진 프레젠테이션을 했지만, 눈에 띄게 수척해 보였다. 하지만 죽음을 맞기 직전까지 "세상을 변화시키는 제품을 만들겠다"는 한 가지에 집중했다. 후임인 팀 쿡(Timothy Cook) CEO가 진행한 아이폰4S 발표회를 집에서 지켜봤던 그는, 다음날 세상을 떠났다.
1997년 잡스가 복귀한 다음해, 애플은 '미친 사람들(crazy ones)'이란 TV광고를 내보낸다. 이 광고는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존 레넌(John Lennon) 등 세상을 바꾼 사람들의 영상을 보여주며 다음과 같은 구절을 낭독한다.
"여기 미친 사람들이 있다. 부적응자. 반항아. 문제아들. 정해진 틀에 맞지 않는 사람들. 사물을 다르게 보는 사람들. 그들은 규칙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현재에 안주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인용하거나, 그들을 부정하거나, 찬양하거나, 비난할 수 있다. 하지만 단 하나,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들은 세상을 바꾸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류를 진보시킨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미쳤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들에게서 천재성을 본다. 자기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미친 사람들이야 말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르게 생각하라'라는 매킨토시의 슬로건과 함께 광고가 끝난다. 사실 실제 방송에는 나가지 않았지만 잡스가 직접 이 내레이션을 녹음한 영상이 잡스 별세 후 공개되었다. 지나칠 정도로 자의식이 강했던 잡스야말로 자신의 창조물로 세상을 바꾸길 원했던 미친 사람이었다.
스티브 잡스의 슈퍼 리치 DNA! 강박
오라클의 CEO이자 잡스의 오랜 이웃인 래리 엘리슨(Larry Ellison)은 잡스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잡스는 하나에, 그리고 디테일에 몰두했다. 그는 모든 것을 통제하길 원했다.", "완벽해질 때까지 멈출 줄을 몰랐다. 그러다 완벽하게 문제를 해결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나면, 다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진했다. 잡스는 끊임없이 다음 문제를 찾아 해결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장인들에게 찾아볼 수 있는 완벽을 향한 일종의 강박증이 잡스에게도 엿보인다. 그가 완벽을 기하는 이유 또한 제품을 팔아 많은 돈을 버는 것이 아닌 최고의 제품을 만드는데 있었다고 하니, 그에게 '21세기의 장인'이라는 칭호를 붙여줘도 아깝지 않을 것 같다.
출처: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89XX2570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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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의 새로운 인간적 면모 13가지
사람을 막 대하는데 대한 자책감 등 드러나
“잡스는 해고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는 데 대해 자책감을 느꼈다. 때로 자신이 존경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당사자에게 가서 사과하기도 했다...“
비즈니스인사이더는 28일(현지시간) 브렌트 슈렌더와 릭 텟젤리의 새 책 ‘스티브 잡스처럼되기:무모한 신생기업에서 비전리더가 되기까지’에 드러난 잡스의 가장 흥미로운 면모 13가지를 소개했다.
애플의 임원들은 이 책에 대해 지금까지 나온 잡스의 책가운데 가장 정확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를 소개한다.
■잡스는 해고를 좋아하지 않았다
스티브잡스가 자녀를 가진 후에 그는 사람들을 해고한다는 일이 더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이 책에 따르면 잡스는 “이 일이 있었을 때 사람들을 보니 내겐 그들이 5살짜리가 된 것처럼 보였다. 마치 내가 내 아이들을 보는 것처럼. 그리고 나는 그것이 마치 내가 귀가해서 아내와 아이들에게 ‘나 해고 당했어’ 라고 말하는 내 모습일 수도 있고, 20년 후의 내 아이들 가운데 하나의 모습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전에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생각한 적이 결코 없었다.”
■잡스는 중학교때 거의 2개 학년을 월반했다.
그는 모두 6개 학년을 월반했다. 그의 선생님은 7개 학년을 월반하는 것까지 검토했을 정도였다.
이후 그의 부모는 이 때가 그를 더나은, 더 어려운 학교로 보낼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로스 알토스지역으로 이사가서 잡스를 캘리포니아에 있는 최고학교 중 한곳에 입학시켰다.
■잡스는 졸업식에 가서 축사하는 것을 좋아지 않았다.
그는 졸업식에 가서 축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의 가족과 보낼 시간을 빼앗아 갔기 때문이다.
잡스는 가족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매일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가족과 저녁을 먹기를 고대했다.
그가 지난 2005년 스탠포드대졸업식 연설을 수락하게 된 데는 2가지 이유가 있다.
이 대학이 자신의 집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가족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그는 스탠포드대의 풍부한 역사, IT분야의 영향력있는 인사들을 배출한 학교라는 점에 대해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잡스는 자신이 존경하는 사람으로부터 요청받게 되면 패배를 인정했다
그는 위대한 비저너리였지만 때때로 울화통을 터뜨리는 스타일이었다. 그는 결코 함께 일하기 쉽지 않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가 존경하는 맥 팀의 엔지니어들이 그만하라고 말하면 그치곤 했다.
빌 게이츠에 따르면 한번은 잡스가 기대했던 일을 해놓지 않은 한 엔지니어를 야단치는 일이 있었다. 이 때 팀원들이 “그만 해 잡스, 우리가 뽑아 쓸 수 있는 사람중에 그만한 친구도 많지 않아. 가서 사과해”라고 말했다. 그러자 잡스는 가서 사과했다.
■잡스는 팀 쿡의 간이식 제의를 거절했다
팀 쿡 현 애플 CEO는 잡스와 아주 친한 사이여서 그에게 자신의 간 일부를 떼어주겠다고 제안했다. 잡스는 그런 생각조차 싫어했다.
잡스는 저자들에게 “이미 그의 말은 내 다리를 잘라내는 것 같았다. 난 ‘안돼’라고 말했고 그는‘난 자네를 이렇게 둘 수 없어, 결코 이렇게 두지 않을 거야’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잡스는 사람들이 자신을 경영을 못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넥스트컴퓨터에서 일할 때 “내 삶이 끝날 때 사람들은 내가 한 모든 창조적 일에 대해 정당한 가치를 인정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아무도 내가 경영하는 법을 아는 줄 모를 거야”라고 말했다.
■잡스의 아버지는 그에게 가장 큰 영감을 주었다
스티브 잡스의 아버지는 그에게 세밀함에 대한 중요성을 가르쳐 주었다. 폴 잡스는 기계 수리공이었고 장인이었다. 그는 때때로 주말에 차를 개조하곤 했다. 그는 잡스가 5~6세 정도됐을 때 자신의 작은 작업대를 주고는 “스티브 이젠 이게 너의 작업대야”라고 말했다.
■잡스의 첫번째 직장 가운데 하나는 사과과수원이었다
그가 대학을 그만두고 아타리에서 일하고 있을 때 그는 오레곤에 있는 사과과수원 공동체에서도 일했다.
■잡스는 정말로 닐 영을 싫어했다
캐나다 가수 닐 영은 아이팟의 압축오디오파일이 음악의 음질을 크게 훼손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가 이런 얘기를 했을 때 잡스는 정말 화가 났다. 무엇보다도 잡스는 이런 사실을 자신에게 말하기 전에 언론에 먼저 공공연히 말했다는 사실에 대해 황당해 했다.
![잡스는 해고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는 데 대해 자책감을 느꼈다. 때로 자신이 존경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당사자에게 가서 사과하기도 했다. 브렌트 슈렌더와 릭 텟젤리의 새 책 ‘스티브 잡스처럼되기:무모한 신생기업에서 비전리더가 되기까지’에 드러난 잡스의 가장 재미있는 면모 13가지중 일부다. 사진=위키피디아](http://img.etnews.com/news/article/2015/03/30/article_30082105656898.jpg)
![](http://js.hnscom.com/etc/hns/black_x.png)
스티븐잡스의 죽기전 한말
I reached the pinnacle of success in the business world.
나는 비즈니스 세상에서 성공의 끝을 보았다.
In others’ eyes, my life is an epitome of success.
타인의 눈에 내 인생은 성공의 상징이다.
However, aside from work, I have little joy. In the end, wealth is only a fact of life that I am accustomed to.
하지만, 일터를 떠나면 내 삶에 즐거움은 많지 않다. 결국 부는 내 삶의 일부가되어버린 하나의 익숙한 ‘사실’일 뿐이었다.
At this moment, lying on the sick bed and recalling my whole life, I realize that all the recognition and wealth that I took so much pride in, have paled and become meaningless in the face of impending death.
지금 병들어 누워 과거 삶을 회상하는 이순간, 나는 깨닫는다, 정말 자부심 가졌던 사회적 인정과 부는 결국 닥쳐올 죽음 앞에 희미해지고 의미 없어져 간다는 것을.
In the darkness, I look at the green lights from the life supporting machines and hear the humming mechanical sounds, I can feel the breath of god of death drawing closer…
어둠 속 나는 생명 연장 장치의 녹색 빛과 윙윙거리는 기계음을 보고 들으며 죽음의 신의 숨결이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Now I know, when we have accumulated sufficient wealth to last our lifetime, we should pursue other matters that are unrelated to wealth…
이제야 나는 깨달았다 – 생을 유지할 적당한 부를 쌓았다면 그 이후 우리는 부와 무관한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Should be something that is more important:
그 무엇이 부보다 더 중요하다면:
Perhaps relationships, perhaps art, perhaps a dream from younger days ...
예를 들어 관계, 아니면 예술, 또는 젊었을 때의 꿈을…
Non-stop pursuing of wealth will only turn a person into a twisted being, just like me.
끝없이 부를 추구하는 것은 결국 나 같은 비틀린 개인만을 남긴다.
God gave us the senses to let us feel the love in everyone’s heart, not the illusions brought about by wealth.
신은 우리에게 부가 가져오는 환상이 아닌 만인이 가진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감각(senses)을 선사하였다.
The wealth I have won in my life I cannot bring with me.
내 인생을 통해 얻는 부를 나는 가져갈 수 없다.
What I can bring is only the memories precipitated by love.
내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사랑이 넘쳐나는 기억들뿐이다.
That’s the true riches which will follow you, accompany you, giving you strength and light to go on.
그 기억들이야 말로 너를 따라다니고, 너와 함께하고, 지속할 힘과 빛을 주는 진정한 부이다.
Love can travel a thousand miles. Life has no limit. Go where you want to go. Reach the height you want to reach. It is all in your heart and in your hands.
사랑은 수천 마일을 넘어설 수 있다. 생에 한계는 없다. 가고 싶은 곳을 가라. 성취하고 싶은 높이를 성취해라. 이 모든 것이 너의 심장과 손에 달려있다.
What is the most expensive bed in the world? - "Sick bed" …
이 세상에서 제일 비싼 침대가 무슨 침대일까? – “병들어 누워있는 침대이다”…
You can employ someone to drive the car for you, make money for you but you cannot have someone to bear the sickness for you.
너는 네 차를 운전해줄 사람을 고용할 수 있고, 돈을 벌어줄 사람을 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너 대신 아파줄 사람을 구할 수 없을 것이다.
Material things lost can be found. But there is one thing that can never be found when it is lost – "Life".
잃어버린 물질적인 것들은 다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인생”은 한번 잃어버리면 절대 되찾을 수 없는 유일한 것이다.
When a person goes into the operating room, he will realize that there is one book that he has yet to finish reading – "Book of Healthy Life".
한 사람이 수술대에 들어가며 본인이 끝까지 읽지 않은 유일한 책을 깨닫는데 그 책은 바로 “건강한 삶”에 대한 책이다.
Whichever stage in life we are at right now, with time, we will face the day when the curtain comes down.
우리가 현재 삶의 어느 순간에 있던, 결국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삶이란 극의 커튼이 내려오는 순간을 맞이할 것이다.
Treasure Love for your family, love for your spouse, love for your friends...
가족간의 사랑을 소중히하라. 배우자를 사랑하라, 친구들을 사랑하라,
Treat yourself well. Cherish others
너 자신에게 잘 대해 줘라. 타인에게 잘 대해 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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