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방한 중에 대선 출마를 강력 시사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8일 낮 뉴욕 유엔본부에서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이해찬 총리를 만나기로 했습니다. 반 총장이 참여정부 인사를 만나는 건 유엔 사무총장 취임 이후 9년 만에 처음이기 때문에 뉴스가 됐습니다. 방미 일행들을 잠시 접견하는 형식이지만 상당히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 전 총리를 비롯해 이호철 전 청와대 정무수석, 도종환 의원 등 노무현재단 관계자들은 노 전 대통령 기념관 건립을 위해 워싱턴과 뉴욕 등지를 돌며 전 미국 대통령들의 기념관을 둘러보는 길이었고, 이 일정을 인지한 반 총장 측에서 만나자고 연락을 해왔다고 노무현 재단 측은 전했습니다. 반 총장의 요청을 재단 측이 수락하면서 만남이 성사됐다는 것입니다.
만남을 주선한 유엔 관계자는 “반 총장이 외교 장관 시절 이 전 총리는 국무총리를 지냈고, 서로 잘 아는 사이지만, 총장 취임 이후엔 첫 만남”이라고 전했습니다. 반 총장의 만남을 주선한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 반기문에 대한 親盧의 반감, 왜?
반 총장은 유엔 사무총장 취임 후 참여정부 인사들을 만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권 후보로 대선출마가 점쳐지는 상황에서 유엔으로 돌아간 뒤 첫 한국 관련 일정으로 이해찬 전 총리를 포함한 노무현 재단 인사들과의 만남을 잡은 것이죠.
그 동안 참여정부 인사들은 반 총장에 대해 서운한 감정을 숨기지 않아 왔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참여정부가 외교적 총력을 기울여 총장에 당선시켰는데, 정작 반 총장이 노 전 대통령 묘역참배조차 하지 않고 참여정부 측과는 거리를 둬 온 것에 배신감마저 표출해 왔습니다. 반 총장을 청와대 외교보좌관으로, 그리고 외교부장관으로 발탁한 것도 노 전 대통령이고, 한국인 유엔 사무총장을 탄생시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한 노 전 대통령 묘역에 참배조차 안한 건 너무하다는 겁니다.
노 전 대통령은 2004년 김선일 씨 피랍사건에 이어 2006년 동원호 선원 피랍사건 때도 장관 경질론이 일었지만, 그때마다 "내가 욕을 먹겠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장관 자르는 걸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한국에서 UN 사무총장이 나온다는 거, 멋진 일 아닌가"하며 막아섰다고 합니다. 또 노 전 대통령은 없는 순방까지 잡아가며 순방 가는 나라마다 정상들에게 반 총장에 대한 지지를 부탁하는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고 참여정부 인사들은 전하고 있습니다.
이 전 총리 역시 순방을 잡아 반 총장 지지에 반대하는 나라들을 찾아 열심히 뛰었다 합니다. 그런데 반 총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장례식에 참여하지 않았고, 이후 2009년부터 2011년 8월까지 여러 차례 방한했지만 노 전 대통령 묘소는 참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비판이 거세지자 2011년 12월에야 처음으로 비공개로 묘소를 찾았다고 합니다.
이같은 이유에서 대선을 염두에 둔 반 총장 입장에선 이와 같은 비판을 희석하고 친노세력과의 관계 복원을 하기 위한 카드로 이 의원과의 만남을 주선한 것이란 해석이 나왔습니다. 여권 후보로 나온다 하더라도 신의 없는 정치인이라는 비난은 피하려는, 적극적인 대선후보 이미지 관리 행보로도 읽혔습니다. 이 의원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친노 세력이 가진 일종의 배신감을 다소나마 누그러뜨리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이해찬 "외교관, 대선후보까지 간 사람 없다"
"정치를 오래했지만, 외교관은 정치에 탤런트가 맞지 않다. 정치와 외교는 중요하지만, 갈등이 심한 정치에 외교관 캐릭터는 맞지 않다. 정치는 돌다리가 없어도 물에 빠지면서도 건너가야 하는데, 외교관은 돌다리를 두드리고도 안 건너간다. 그동안 외교관을 많이 봤지만 정치적으로 대선 후보까지 간 사람은 없었다. 외교 차원의 정치는 하지만 경제와 사회, 정책, 문화, 교육 등 외교관계 이외에 나머지 영역에서는 인식이 그렇게 깊지 않다. (반 총장도) 국내 정치를 하는 데 과연 적합한지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반 총장을 야권후보로 생각하는 야당은 없는 것 같다" - 이해찬 전 총리, 워싱턴DC 인근 버지니아에서 기자들에게..
친노 진영 내에서도 반 총장과의 만남에 대한 반대 의견이 상당했지만 이를 수락한 이 전 총리. SBS 보도를 통해 만남 계획이 알려진 뒤, 기자들을 만나 ‘반 총장 대망론’을 상당히 거칠게 비판했습니다. 사실상 친노의 수장 이미지가 강한 이 전 총리, 그러나 이번 총선에서 컷오프 후 무소속 당선 이라는 고비를 넘어 복당을 해야 하는 무소속 이해찬 의원으로선 이번 만남을 통한 존재감 과시가 중요했기 때문이라는 관측도 나왔습니다.
그런 의미에선 모든 언론의 주목을 받은 이번 기회가 나쁘지 않았습니다. 참여정부 시절을 신경 안쓸 수 없다는 걸 과시하고 오랜만에 본인의 영향력을 보여줄 수 있는 계기가 됐다는 거죠. 그러나 반 총장이 야권과 손 잡을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내부 비판이 제기되자, 즉각 ‘반기문 대망론’에 직격탄을 날리게 된 걸로 보입니다.
● 반기문 측 "불쾌…李측이 만남 요청"
만나기도 전에 이해찬 전 총리의 거센 비판을 접한 반 총장 측은 불쾌감을 표현했습니다. 반 총장의 측근들은 "외교관들이 국내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아니지만, 반 총장 만큼의 지위에 올라간 외교관에게 그렇게 얘기하는 건 조금 그렇지 않을까"라는 의견을 전했습니다. '반기문 대망론'을 외교관 출신이라는 이유로 일축한 건 과하다는 겁니다.
"이미 만남이 이뤄진 줄 알았다. 만나기도 전에 그렇게 말하는 건 조금 그렇지 않을까”하는 말도 나왔습니다. 하루 뒤엔, 유엔 대변인의 공식 멘트가 나왔습니다. 스테판 두자릭 대변인은 정례브리핑에 “반 총장과의 만남은 한국 측의 요청에 따라 이뤄진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 뉴욕 회동 결국 취소…관계 회복 '실패'
뉴욕 현지시간으로 8일 낮에 이뤄질 예정이었던 회동은 결국 취소됐습니다. 이 전 총리 측은 "이 전 총리와의 면담을 언론에 공개하겠다는 입장을 반 총장 측이 알려와 면담을 취소하기로 했다“고 밝혔습니다. 유엔 측에서 면담 요청 사실을 부인한 것도 면담을 취소한 이유 중 하나라고 밝혔습니다. 유엔 쪽에서 ‘오신 김에 차나 한잔 하자’해서 보기로 한 건데, 사실과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면 굳이 만날 필요가 있느냐는 의견이 나왔다는 겁니다. 유엔 측도 면담은 취소됐다고 밝혔습니다.
결국 양측이 감정만 상한 채 ‘인사나 나누는 관계 회복’도 어려워졌습니다. 반기문 총장 입장에선 이 전 총리와 만남을 통해 노 전 대통령 묘역 참배를 둘러싼 반감을 해소하고, 야권 지지자들의 반감을 누그러뜨릴 생각을 했을 텐데 신경전만 벌이다 기회를 잃게 된 셈입니다.
대권을 생각하는 상황에서 여권 주자로 나서더라도 야권과의 관계 회복은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취임을 도왔던 핵심인사를 만나 그동안 소홀했던 예를 갖추는 형식으로 ‘배은망덕, 신의 없는 정치인’이란 이미지를 벗고 불편한 관계를 조금이라도 풀어보려했지만, 골은 더 깊어진 셈이 됐습니다. 이미 전 총리의 거친 비판에 감정이 상해 만나봐야 승산이 없을 걸로 판단한 걸로 보입니다.
이해찬 의원 역시 불쾌감을 드러냈다는 후문입니다. 야권의 어른으로서는 이미 어느 정도 존재감 드러냈고, 상대 측에서 사실을 왜곡하고 나선 마당에 굳이 만날 필요가 없었겠죠. 괜히 만났다가 반 총장의 대권 행보에 정치적 이용만 당할 수 있다, 논란만 증폭될 수 있다는 주변의 우려가 컸다고 합니다. 이번 만남 불발로 양측의 관계 개선이 언제 가능할지 기약하기 어렵게 됐습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친노(親노무현)계 좌장' 이해찬 전 국무총리(노무현재단 이사장)의 '뉴욕 면담'이 만남(8일·현지시간) 하루 전 취소되면서 그 배경에 궁금증이 일고 있다.
정치권에선 내년 대선을 앞두고 여권이 반 총장에게 적극적으로 러브콜을 보내는 상황에서 참여정부 시절 국무총리(이해찬), 외교부 장관(반기문)으로 인연이 깊은 두 사람의 만남에 상당한 관심이 쏠렸다.
반 총장이 노무현 정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최근 사실상 여권 대선주자로서 행보하고 있는데 대한 이 전 총리 및 친노 인사들의 서운함, 향후 서로의 행보 등에 관한 언급들이 있을 것이라는 관측에서다.
8일(한국시간) 이 전 총리 측이 밝힌 면담 취소 이유는 "면담의 성격이 변했다"는 것이다.
이 전 총리와 동행하고 있는 오상호 노무현재단 사무처장 및 관계자들에 따르면, 이번 면담은 이 전 총리가 미국 국무부의 초청을 받아 뉴욕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유엔대표부, 즉 반 총장 측에서 먼저 이 전 총리 측에 면담을 제안함에 따라 비공개로 추진됐다.
그러나 한 언론을 통해 면담 일정이 공개되면서 꼬이기 시작했다. 여기에 '반 총장 제안, 이 전 총리 수락'이라는 회동 형식에 대해서도 반 총장 측은 '한국에서 먼저 요청했다'며 불쾌해했다는 후문이다.
결국 일련의 상황을 둘러싸고 진실공방 분위기가 조성된 가운데 반 총장 측에서 '면담 내용을 추후에 언론에 공개하겠다'고 전하면서 정치적 비화 가능성을 우려한 이 전 총리 측에서 '아예 만나지 않는 게 좋겠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반 총장 측도 이 전 총리 측에서 면담을 취소하자고 하기 전, 이미 기분이 상한 상태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전 총리가 지난 5일 오후(현지시간) 미국 버지니아주 한 식당에서 동포간담회 후 기자들과 만나 "정치에 외교관 캐릭터는 맞지 않다"고 이른바 '반기문 대망론'에 직격탄을 날리면서다.
재단 측 관계자는 뉴스1과의 통화에서 "원래 이 전 총리 발언이 다소 센 부분이 있다. 이 전 총리 당시 발언은 (대망론을 깎아내리려는) 말씀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며 "반 총장이 향후 북한 등 전반적인 국제상황에 대해 주요한 역할을 해주는 게 국가적으로 더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는 뜻이었던 걸로 안다"고 말했다.
결국 이번 만남이 불발된 데에는 서로에 대한 오해와 불신이 쌓인 상황 속에서 두 사람이 만나도 별다른 실익이 없을 것이란 양측의 전략적 판단에 따라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이 의원측 관계자는 "'굳이 이런 상황에서 만날 필요가 없다'고 서로 동의해 만나지 않기로 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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